철 지난 바닷가 모래밭에서 금속탐지기를 이용해 모래를 뒤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무엇을 찾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그날 찾아낸 것들을 끄집어내어 보여주는데 깜짝 놀랐다. 얼핏 보기에도 꽤 값이 나갈 것 같은 반지 몇 개와 목걸이 몇 개가 보였다. 그 밖에도 동전 종류는 꽤 많아 보였다. 피서철 내내 북적였을 피서객들이 아깝게 잃어버리고 간 것들을 줍고 있었다. 이 사람은 쏠쏠한 수익으로 기뻐하고 있지만, 시간을 며칠 거꾸로 돌려보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이 누리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망감을 여러 사람이 맛보았을 것이다. 대체로 반지나 목걸이는 돈으로 환산한 값어치를 훨씬 뛰어넘는 정서적 가치(sentimental value)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귀한 것들을 아차 하는 순간에 모래 속에 빠뜨려 버렸다. 아무리 더듬어도 더 깊이 숨어버리고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상실감과 낭패감에 가슴 아파했을까. 더 이상 찾기를 포기하고 모래밭을 떠나는 사람들의 심정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것,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짙은 아픔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아 내 주여, 이것은 빌려온 것이니이다.”(6:5) 이 말에는 돌이킬 수 없음의 낭패감과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무력감, 그리고 회복 불능의 두려움이 복합된 절망이 느껴진다. 좋은 의도였다, 도끼를 빌린 것은. 선지자 학교의 생도들이 기숙사를 새로 짓기 위해 벌목을 하다가 빌려온 도끼를 물에 빠뜨려 버린 것이다. 당시 쇠 연장이 지니는 가치는 요즘의 중장비 가격에 버금가는 가치였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예배당 건축하는 데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친구의 픽업트럭을 빌려 타고 가다가 벤츠를 들이받는 사고를 낸 것과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보험은 차주 이름으로만 되어 있어 보험금도 받을 수 없다. 픽업트럭을 팔아도 벤츠 수리비를 감당하지 못한다. 물어주자니 돈도 없고, 자기 실수로 친구의 전 재산도 다 날리게 생겼다. 뭐 이런 상황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일은 벌어졌고 수습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예시는 끝이 없다. 어쩌다 약간의 빚을 지게 되었는데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평생 빚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어져 버린 경우도 있을 것이다. 결혼생활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부부 사이가 한참 어긋나버려서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린 경우도 있겠다. 자식이 가출했을 수도 있다. 신앙생활이 점점 지치고 메말라지더니 이젠 밥 먹을 때의 짧은 기도 한마디도 안 나오고, 온종일 성경 한 줄 안 읽고 완전히 불신 상태에 빠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나이 드는 것이 갈수록 서글픈데 세월은 붙잡을 수 없이 흘러가 버리는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짐 콘웨이가 쓴 《중년의 위기》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기분이 잘 표현된 문장이 나온다. “태양은 조용히 계속 뜨고 사랑과 무관하게 우리 모두는 하루씩 더 늙어간다.” 태양이 날마다 떠오르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고 하루씩 더 늙어가는 것도 어떻게 하겠는가. 어떻게 할 수는 없고 돌이킬 수 없지만 서러운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의도는 전혀 잘못되지 않았는데, 어찌하다 보니 돌이킬 수 없는 회복 불능의 결과에 빠져버린 것이다. 물에 빠진 쇠도끼는 회복 불능의 가치다. 이제 도끼는 도끼만이 아니라 당신의 인생이요, 자동차요, 배우자요, 자녀요, 은행 잔고다. 당신의 도끼는 안녕하신가?
선지 생도의 절망적 외침을 듣고 엘리사가 나뭇가지 하나를 물에 던져 넣자 쇠도끼가 물 위로 떠올랐다. 이런 장면들을 성경에서 만나면 우리의 지성이 불편해진다. 어떻게 쇠도끼가 물 위로 뜰 수가 있단 말인가.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 당신이 정하신 법칙을 어기는 것이 되지 않는가.
우리가 알든 모르든, 또한 인정하든 안 하든 간에 이 세상은 물리학적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 지구의 중심은 질량이 있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있고, 쇠는 밀도가 부력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물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물리적 법칙은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것이다. 사람이 발견하고 공식들을 만들고 법칙에 이름을 붙일 수는 있지만, 이런 법칙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법을 스스로 어긴다는 것은 하나님답지 않은 행동이 아닌가. 이런 초법적인 일들이 마구 일어난다면 세상은 불공평하고 혼돈스러워지지 않겠는가. 물리적 법칙이 뒤집어지면 상식도 뒤집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부자가 되고, 공부 안 해도 백 점을 받고, 노력하지 않아도 성취할 수 있는 기적들이 마구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서 정직과 노력, 성실성 같은 덕목들은 다 무가치해질 것이 아닌가. 이런 측면에서 초법적이고 초월적인 기적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모두는 그런 기적들을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는 일으켜주셨으면 좋겠다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하곤 한다. 정말로 내가 도끼를 물에 빠뜨린 선지 생도라면 얼마나 간절하게 그런 기적을 바라고 또 바라겠는가. 불치의 암에 걸렸다면 통계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다 죽더라도 나에게만은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길 얼마나 바라겠는가.
하나님의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이다. 일반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은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구별 없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 물과 공기도 마찬가지다. 사시사철의 변화, 산과 바다에서 나오는 자연의 선물들 등 인간이 심지도 가꾸지도 않았지만 먹고 마시고 누릴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이미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주셨다. 그리고 이런 일반 은총은 하나님의 법칙 안에서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베풀어진다. 하나님이 일반 은총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위해 굳이 자연법칙, 곧 물리학적 법칙을 깨뜨릴 필요가 없으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세계에는 일반 은총을 넘어서는 특별 은총이 하나 더 있다. 특별 은총은 하나님께서 만물 안에 심어놓으신 모든 법칙을 뛰어넘는 특별한 은혜다. 오늘 본문 사건에는 이 특별 은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영적 원리가 담겨 있다. 도끼가 빠졌다고 탄식할 때 엘리사는 이상한 행동을 한다. 나뭇가지 하나를 도끼가 빠진 곳에 던져 넣은 것이다. 그러자 쇠도끼가 떠오른다. 여기에서 연상되는 사건이 하나 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겨우 물을 발견했지만,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 이때 모세는 나뭇가지 하나를 쓴물에 던져 넣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쓴물이 단물로 바뀐다. 두 사건 모두 나뭇가지가 등장하는데, 나뭇가지가 하는 역할은 나뭇가지의 물리학적 성질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쓴물을 달게 하는 데 나뭇가지의 물리적 구조나 화학적 성분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는 데 역시 나뭇가지가 무슨 물리적 기여를 하겠는가.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뭇가지가 상징하는 것에 대한 사실적 해석보다는 풍유적(Allegorical) 해석이 필요해진다. 풍유적 성경 해석은 초대교회 교부들 사이에 널리 행해진 해석 방법이다. 겉으로 드러난 단어의 의미는 최소화하고 감추어진 영적 의미는 최대화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성 어거스틴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런 식으로 해석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아담이고, 강도는 마귀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약성경이고 여관은 교회다. 여관 주인은 바울이며,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맡긴 동전 두 잎은 신구약 성경이다. 이런 식의 해석은 때로는 탁월하지만, 때로는 억지춘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풍유적 해석을 철저히 배제했다. 하지만 성경에는 분명 알레고리가 존재한다. 씨 뿌리는 비유, 열 처녀 비유, 무화과 비유 등이 그렇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모형들도 많이 나타난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는 예수님이 친히 자신을 상징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무조건 풍유적 해석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배경과 해석적 합리성을 따라 지혜롭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
본문을 완전히 풍유적 해석법에 따라 해석하면 이런 식이 된다. 물에 빠진 도끼는 죄의 무게로 인해 가라앉는 인간의 영혼이다. 인간의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점점 무거워져 마침내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요단강은 심판의 강이다. 엘리사는 그리스도고 나뭇가지는 십자가다. 이런 해석에 은혜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나도 나름 합리적인 사람이고 MBTI도 J형이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풍유적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뭇가지가 십자가의 상징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 외에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적 근거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광야에서 불평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많이 죽었다. 이때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라고 하신다. 그리고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살았다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명기 21장에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바울이 이 구절을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사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고 설명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나뭇가지를 십자가의 상징으로 해석할 만한 근거가 된다고 본다.
복음을 쉽게 설명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죄와 저주와 절망을 다 수거해서 해결해 버린 장소다. 하여 뱀의 독도 빨아들이고, 쓴물도 빨아들여 단물이 되게 하며, 물에 빠진 도끼의 절망도 흡수하고 희망을 내뿜는 것이다. 모든 죄는 그곳에서 사라지고 의로움이 된다. 한국의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할 때 탁자 앞에 “The buck stops here”라는 팻말이 보였다. 바이든 대통령이 선물로 준 팻말이라고 한다. 원래는 트루먼 대통령이 사용한 말인데, “모든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 즉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내가 진다는 의미다. 모든 죄와 저주와 절망과 형벌, 그리고 죽음까지도 십자가에서 멈춘다. 예수님이 책임지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준으로 우리는 역사를 그 이전(B.C.)과 이후(A.D.)로 나눈다. 그런데 한 인간의 개인적 맥락에서는 십자가가 일반 은총의 시대와 특별 은총의 시대로 나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이해하기 전에는 우리는 일반 은총만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십자가가 나에게 개인적 의미로 다가오면서 그때부터는 특별 은총의 시대를 살게 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십자가는 모든 상식과 모든 물리학적 법칙을 뒤집는 일대 혁명이었다. 생각해 보라. 십자가는 죽음에서 부활을 일으켰다. 죽은 자의 부활은 물리학적 법칙에 전혀 부합하는 사건이 아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의로움에 대한 정의가 뒤집혔다. 의롭다는 것은 계명을 철저히 잘 지키는 모범 생활자에게 주어지는 선언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바른 생활과 관계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뒤집어진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선언에서부터 삶의 정의가 뒤집힌다. 잘 사는 삶은 성실하고 열심 있고 착하고 때로는 운도 좋아야 하는데, 이제부터는 살아가는 방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믿음이다.
진리의 의미도 뒤집어진다. 십자가 이전에는 진리란 옳고 그름 가운데 옳음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사실과 허구 가운데 사실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가 진리”라고 선포하신 후, 더 이상 진리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진리는 인격이 되었다. 예수님이 진리다.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진리고 예수님의 관점이 있어야 진리다.
물리학에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있다. 하나의 존재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주변에서 계속 무질서가 증가해야 한다는 법칙이다. 나라는 존재가 죽지 않고 병들지 않고 질서, 즉 건강을 유지하려면 내 주변에 수많은 무질서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음식물을 먹어 치우고, 수많은 쓰레기를 배출하고, 자연을 오염시키는 등등. 그러나 그렇게 해도 무한정 나의 질서를 유지해 나갈 수 없다. 결국은 나 자신의 무질서도 증가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서서히 병들어 늙고 죽어간다. 이게 물리학적 법칙이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 이후 이런 법칙을 뒤집는 새로운 법칙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물리학적 법칙에 의해 육체의 겉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날마다 하루씩 더 늙어가지만, 반면에 우리 속사람은 물리학의 법칙을 초월한다. 아니, 뒤집는다. 날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워져 간다. 물리학적 법칙에 의해 우리 육체는 무너지지만, 십자가의 법칙은 그 무너진 자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운다. 그리고 결국 중력의 법칙도 초월해서 영원한 천국으로 이끌어 간다. 삶에 대한 태도와 가치도 뒤집어진다. 고린도후서 6:9-10절이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없다.
십자가 이후의 삶은 상식과 물리학적 법칙을 넘어선 특별 은총 안에서의 삶이다. 주님이 십자가 이후에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여 주신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이 약속은 우리의 기도에 따라 예수님이 친히 자연 법칙을 넘어서는 수많은 일들을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과 다름없다. 따라서 십자가의 특별 은총 안에서 오늘도 쇠도끼는 물 위로 떠오르고 있다. 돌이킬 수 없었던 수많은 아픔이 치유되고 있고, 회복 불능의 관계와 손실이 회복되고 있으며, 구제 불능의 삶이 구제되고 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탄식이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고 있다. 굳이 쇠도끼가 물 위로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도끼를 잃어버린 빈 손으로도 내 영혼이 절망의 무게를 이기고 떠오른다면, 그것이야말로 쇠도끼가 떠오르는 것보다 더 놀라운 특별 은총이 아니겠는가.
안타깝게도 믿음이 없으면, 은총을 누리면서도 그것이 은총인 줄을 모른다. 매일 누리는 햇빛과 공기가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라는 사실을 모른 채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일반 은총의 문턱에서 멈춰 서 있기에, 그 너머에 있는 특별 은총의 신비는 꿈조차 꾸지 못한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을 다 누리고 산다. 일반 은총에 대해서도 훨씬 더 깊고 풍성하게 누리며 감사한다. 속절없이 해가 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하루인 것이다. 다 같이 하루를 살고 누리지만 그 하루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감동이 다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일반 은총을 뛰어넘은 특별 은총도 맛보기 시작한다. 쓴물이 단물로 바뀌고 쇠도끼가 떠오르는 경험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특별 은총은 인간의 지성을 완전히 뛰어넘기 때문에 설명이 잘 안 된다. 어떤 유형도 없다. 공식도 만들 수 없다. 예측 불가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역사하실지 모른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거룩한 기대감으로 설렐 수 있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은혜를 만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나를 위한 기적, 나만을 위한 기적은 늘 내 앞에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그냥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설명하셔야 할 의무도 없고, 우리가 하나님께 설명을 요구할 수도 없다. 이해가 안 되고 예측이 안 된다고 투정할 필요도 없다. 은혜는 그냥 누리는 것이 맞다. 이 은혜가 없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은 그냥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모래밭에서 잃어버린 반지는 영원히 찾을 수 없고, 물속에 빠진 쇠도끼는 영영 잃어버린 것이며, 깨어진 관계는 회복 불능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 모든 돌이킬 수 없는 것들 가운데 소망이 생겨난다.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는 모른다. 다만 우린 믿고 구하고 기대하며 기다린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면 감사하고 누리면 될 일이다. 절망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이 세상에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음’은 없으니까.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