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라는 말을 아는가. 지금도 좀비영화가 꾸준한 유행을 하고 있다. 살아있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존재. 살아있으면서도 산 것 같지 않고 죽지 않았으면서도 죽은 것같은 존재. 이게 좀비다. 좀비는 아프리카 콩고어로 영혼 혹은 신이라는 뜻이다. 죽은 자의 영혼이 다시 돌아온다는 아프리카의 정령신앙이 17~18세기 노예무역의 영향으로 서인도제도 특히 아이티로 유입되면서 아프리카 정령신앙과 아이티 카톨릭 문화가 만나서 부두교가 만들어진다. 부두교에서 주술사가 죽은 사람을 살려내서 영혼이 없는 육체만 가진 존재로 만들어 노예처럼 부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런 존재를 좀비라고 불렀다. 1915년 미국이 아이티를 점령하면서 좀비가 서양으로 유입되는데 1932년부터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 후, 좀비에 대한 상상력이 확장되면서 이제 더 이상 마법에 의해 탄생된 존재가 아니라 바이러스나 전염병의 감염 혹은 과학실험을 결과로 만들어진 존재로 진화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좀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나름 이유가 있어보인다. 사람인데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살았는데 산 것은 아닌 것 같은 존재가 만들어지니까, 사람을 대상으로는 감히 저지르지 못할 끔찍한 폭력이나 집단 학살같은 장면을 훨씬 자극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즉 볼거리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소재가 된 것이다.
요즘은 영화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좀비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샌프란시스코 시내만 나가도 골목 골목에서 펜타닐이란 마약에 중독되어서 몸이 구부러지고 관절이 꺽긴 채 굳어버린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펜타닐을 좀비마약이라고 하고 이런 사람들을 펜타닐 좀비라고 부른다. 마약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에 중독된 젊은 세대로 차츰 늘어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길을 걷고 건널목을 건널 때도 스마트폰만 보고 다닌다. 밥 먹을 때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래서 목은 거북목이 되고 스마트폰에 집중해있다 보니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을 스몸비라고 부른다. 스마트폰과 좀비의 합성어다.
좀비의 특징은 활동성이 철저히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안한다. 오직 어떤 특정 자극에만 반응한다. 평상시에는 시체처럼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다. 특히 빛이 있는 때는 정말 시체가 되어버린다. 어둠이 찾아오면 꿈지럭 꿈지럭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소리가 들리거나 냄새가 나면 반응한다.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목적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말도 못한다. 생명활동은 하나도 없고 오직 자극에 따라 움직이고 조종당할 뿐이다. 그러니 움직인다고해서 살아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오늘 설교 제목이 좀 죄송스럽다. 좀비 신앙이라니. 신앙에 좀비라는 말이 붙다니. 기분나쁠 수 있다.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고 불경하다고 비판할 수 있겠으나 선한 목적을 위해 조금 과장을 했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런데 사실 성경에도 이런 표현이 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주님이 사데교회에게 하신 요한계시록 3장 1절 말씀이다. 살았으나 죽었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존재. 이게 바로 좀비 아니겠는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26). 영혼없는 몸을 좀비라고 한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좀비 신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들면 활동성이 줄어든다. 자신감도 결여된다. 생각도 위축된다. 영향력도 감소한다. 먹고싶은 것도 없어지고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곳도 없어진다. 흥미로운 것이 없어지면서 다 시들해지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진다. 책임감, 사명감, 이런 단어들은 부담스러워진다. 그렇게 역동성이 줄어들다 보면 좀비현상이 나타나기 쉽다. 신앙적으로도 그렇다. 지난 주일에 삶은 감동이라고 설교했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면 감동이 희미해진다. 영적인 열정도 식는다. 신앙이 습관적이 되기 쉽다. 구원의 확신도 희미해지고 천국에 대한 소망도 흐릿해진다. 당신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사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자신있게 대답할 말이 없다. 누군가가 믿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마저 대답하기가 머뭇거려진다. 스스로도 내가 믿음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리는 것이다.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책망받았던 사데교회처럼 되어가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그랬다. 고레스왕의 칙령에 의해 돌아올 때는 분명 충만한 사명감이 있었다. 성전터를 새로 놓을 때만 해도 목표가 분명했다. 그러다가 반대에 부딪히고 환경과 여건이 어려워지면서 위축되기 시작했다. 사명의식도 줄어들고 헌신도 줄어들다가 더 이상 움직임이 없어졌다. 좀비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럴 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자극을 가한다. 학개와 스가랴가 나타났다. 일어나 건설하자고 외친다. 겨우 좀비증상을 깨트리고 일어나서 성전건축을 완성했다. 그러나 다시 시간이 몇 십년 지나면서 목표가 없어지고 사명감도 둔해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도 희미해진다. 다시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는 좀비증상이 재현된다. 하나님은 이제 에스라를 보낸다. 에스라의 메세지도 좀비증상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처방이지만 특히 에스라는 삶 자체가 좀비증상에 걸린 신앙인들이 본받아야 할 역동성으로 가득 채워져있있다. 보통 신앙적으로 본받을 만한 인물로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다니엘, 바울, 이런 사람들을 들지만 여기서 에스라도 빠지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에스라의 역동성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좀비증상을 예방, 혹은 치료하기 위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에스라의 세 가지 역동성을 처방으로 제시해 주신다.
첫째, 에스라는 결심이 있었다. 믿음은 결심이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7:10)
에스라는 학사였고 제사장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했다는 것은 당연하다.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결심이 중요하다.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지만 그냥 하는 일하고 결심하고 하는 일은 다르다. 그 일을 하는 열심과 몰입도 그리고 지속성과 성실성에서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누구나 당연히 하는 일은 어차피 할 것이다. 가르치는 일이 직업인 사람은 가르칠 것이고 고객응대가 직업인 사람은 고객을 응대할 것이다. 그런데 해야하는 일을 그냥 하는 것과 결심하고 하는 일은 다르다는 말이다. 같은 일을 해도 일의 질과 시간의 질이 확연히 달라진다. 다음 주일에 또 살펴보겠지만은 에스라는 가르치는 일을 결심을 했던 것처럼 잘 했다. 성실하고 꾸준히 끈질기게 해냈다.
좀비신앙을 벗어나려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결심하고 해내야 한다. 이스라엘은 마땅히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고 신앙공동체를 재건했었어야 했다. 그게 그들이 돌아간 목적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일을 시작도 하고 얼마간 노력도 했으나 꾸준하고 성실하게 끝까지 해내지를 못했다. 그리고 주저앉아 좀비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결심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한 번의 결심이 가지는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올바른 결심을 했으면 그 이후로 지속적으로 그 결심을 새롭게 다짐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결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와 주님을 영접하는 결심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생명있는 동안에 이 결심을 다짐하고 또 확인하면서 살아야 한다. 가치있는 결심은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고 또 붙잡아야 한다.
결심은 했으나 그 결심대로 살지못하는 것이 죽은 믿음, 즉 좀비 신앙이라면 살아있는 믿음은 결심 이후에 그 결심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결심한 것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결심이 퇴색되지 않도록 또 결심하고 결심해서 내가 결심한 것이 내 삶에 열매로 맺히는 것을 확인해 나가는 것이다.
나는 목회자가 되면서 성경의 진리를 잘 연구하고 잘 설교하고 잘 가르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목회할 동안 매일 새벽 기도할 때마다 내가 기도처럼 묵상했던 성경구절이 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써 도울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서 50장 4절 말씀이다. 말씀을 읽고 연구할 때는 학자처럼 깨달을 수 있게 영감을 주시고, 그 말씀을 가르치거나 설교할 때는 사람들이 귀를 열고 알아듣고 은혜받을 수 있는 말로 전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그리고 목회하는 동안 열심히 설교했고 열심히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그런데 목회에서 은퇴하면서 그 기도도 중단되고 가르치는 일도 중단되었다. 지금 학교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하고 나름대로 보람도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함이 있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싶다는 갈증이었다. 그래서 미얀마로 가서 선교사님들을 대상으로 설교세미나를 했다.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확실히 느꼈다. 이건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앞으로 언제까지 내 건강이 허락할 지는 모르겠지만 바라기는 앞으로 10년 동안, 매년 한 번씩은 미얀마에 가서 한인 선교사님들이나 미얀마 현지인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인도하기로 결심했다. 이 결심이 내 삶에 얼마나 큰 역동성을 가져왔는지 모른다.
믿음은 결심이다. 우리 각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결심이 있고 난 다음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하겠다고 결심했던 일들이 있을 것이다. 단기 선교를 가겠다든지, 십일조를 하겠다든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든지, 성경 일독을 하겠다든지, 새벽 기도를 하겠다든지, 어떤 봉사나 헌신을 하겠다든지 하는 결심들이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희미해진 그 결심을 떠올려보길 바란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마땅히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 일이 무엇이든지 다시 한 번 결심하기를 바란다. 그 결심이 죽은 것같은 우리 신앙을 살려낼 것이고 좀비 같은 우리 신앙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다.
두번 째, 에스라는 용기가 있었다. 믿음은 용기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하라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우리에게 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버리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를 들으셨느니라” (에스라 8:21-23)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왕과 방백들과 백성들에게서 헌물로 받은 것을 지금 시세로 환산하면 약 3,577억원에 달한다. 이런 보화를 가지고 4개월에 걸쳐서 1500Km를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런 여정을 무장 병력의 호위없이 가야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엄청난 인정을 받았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을 구하든지 왕이 다 허락했다. 그래서 만약 행렬의 호위병력을 요구했으면 아무 문제 없이 제공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라는 이걸 안 했다. 왜? 자기가 왕에게 한 말 때문이었다.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이 실제로 왕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아닥사스다 왕이 왜 에스라에게 그토록 큰 특권과 재량권을 부여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보냈는지에 대한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 에스라 7:23절에 있다. “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 에스라는 아닥사스다에게 가르쳤다. 하나님은 한 지역의 신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바사의 왕과 왕자들의 운명도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고. 만약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배반하면 엄청난 심판이 임할 수 있다고. 그렇지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면 선을 베푸실 것이라고. 아닥사스다는 이 말을 진심으로 듣고 믿었다. 행여 그의 관리들이 명령에 불순종해서 자기 마음과 달리 하나님께 대해 잘못해서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해서 엄중하게 명령한다. 하나님의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잘 하라고. 그런데 왕에게 그런 말을 하고 그런 영향력을 끼쳐놓고 에스라 본인이 막상 자기는 하나님이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신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서 호위병력을 구하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적 자존심이었고 현실은 두려웠다. 그래서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콘트롤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 두려움을 느낀다. 평소에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자신을 위해 안전지대를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보험이 있다. 직접 운전을 하는 사람들은 다 자동차 보험을 든다. 은퇴하신 분들은 나름 은퇴계획을 세워서 연금 같은 것들을 확보해 놓는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생존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 놓는 것이다. 그런 장치들이 울타리가 되어서 우리의 안전지대를 만들어준다. 그 안에 있을 때면 안전함을 느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안전장치들이 작동을 안 할 때가 있다. 혹은 그런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수 있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심각하게 아프든가, 예기치 못한 재정적인 손실이 생기든가, 자식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가운데 빠진다든가. 내가 도저히 핸들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길 때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함을 고백하게 되고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가 정말 우리가 나의 안전장치를 믿는가 하나님을 믿는가가 판가름 나는 순간이다. 두려움에 매몰되어서 기도조차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 대신 다른 대책들을 찾아헤멘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때는 정말 기도할 때다. 에스라가 금식하면서 기도했듯이 내 문제를 오롯이 하나님께만 맡기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경험들을 해봐야 한다. 말하자면 내 뒤를 쫓아오는 바로와 나 사이에 하나님의 불이 내려서 보호를 받는다든가, 내 앞에 있던 바다가 갈라지면서 바다속에 가리워져 있던 길이 나오든가 하는 경험들을 해봐야 한다. 에스라도 실제 어려움을 당했다.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8:31). 어떤 위기였는지 모르지만 에스라가 두려워하고 짐작했었던 그런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는 모르지만 구원도 있었다. 에스라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었다는 것을 알았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믿음이 견고해진다. 그러나 이런 경험들이 쌓이기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두렵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한 번 용기를 내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구원을 경험하게 되면 믿음은 더 강해지고 용기도 더 강해진다. 두려움은 옅어지고 위기 극복 능력은 더 뚜렷해진다. 결국 용기가 있어야 간증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믿음이 견고해질 수 있다. 신앙의 역동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좀비증상에 걸린 것은 이 용기의 부족이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공동체를 세우려고 했을 때 그 땅 주민들의 반발이 집요했고 극심했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할 정도로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핍박하고 위협하고 상소했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계속 하다가는 피할 수 없는 충돌이 일어날 것이고 우린 다 망할 수 있다. 중단하자. 이쯤에서 그치자. 언제가 다시 기회가 오겠지.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미루어놓는 거다. 이렇게 두려움에 눌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중단하고 좀비처럼 허리가 꺽여 주저앉은 것이다. 허리를 펴고 일어서고 싶은가. 마약중독자들이 펜타닐을 끊어야 하듯이 우리는 두려움이 끊어내야 한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하나님께 내 상황을 온전히 맡겨드려야 한다. 내가 아무런 대책이 없을 때 하나님이 실질적인 대책이 되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해봐야 한다. 믿음으로 살았는데 실패하면 어떻하냐? 이런 질문 생길 수 있다. 그런데 그건 괜찮다. 우리가 믿음으로 못 사는 것이 문제지 실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만의 하나, 믿음으로 살았는데 실패처럼 보인다면 어떡하나.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다음 주일에 알려드리겠다. 암튼 믿음으로 살았다면 괜찮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지 결과를 보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결과가 실패처럼 보인다고 해서 정말 실패인가 하는 것은 다시 따져봐야 할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여러분 평생에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내어 믿음을 선택했던 경험이 얼마나 되는가. 앞으로 우리들의 남은 시간동안 용기를 발휘해서 강력한 믿음의 간증들을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세번 째, 에스라는 영향력이 있었다. 믿음은 선한 영향력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고나서도 한참동안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공존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가운데 사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사는 것이다. 반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세상은 우리를 세상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한다. 이 싸움에 패해서 세상의 영향력 아래 눌리면 신앙적 좀비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올 때부터 이 싸움은 피할 수 없었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싸움에서 이기기보다는 질 때가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에루살렘 재건의 거룩한 사명은 반대에 눌려서 중단되었고 삶 가운데도 세상의 영향력이 밀고 들어와서 제사장들조차 이방 여인을 집으로 들여서 아내로 삼고 살았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보다는 세상의 영향에 굴복해서 하나님이 백성이라는 이름만 가진채 실상은 좀비처럼 산 것이다. 이때 에스라가 돌아오는데 에스라의 삶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그가 가졌던 선한 영향력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에스라는 학사와 제사장으로서 바사의 왕 아닥사스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에스라서를 쭉 읽어보면 아닥사스다 왕에 대해서 엄청난 반전을 발견하게 된다. 예루살렘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아닥사스다에게 편지를 보내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멈추게 해달라고 탄원했을 때 아닥사스다는 그 탄원을 받아들여서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금지한다(4:21). 그런데 에스라를 보낼 때는 엄청난 권력과 재물과 특혜를 주고 성전을 돌보고 예루살렘을 잘 살피라고 돌려보낸다. 같은 사람인가 의심할 정도로 극단적인 태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첫번째 결정과 두번째 결정 사이에 무슨 영향을 받은 것일까. 짐작컨대 이것이 에스라의 영향력이다. 이 영향력은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와있는 동안에도 계속되어서 13년 후에 느헤미야를 돌려보낼 때도 아닥사스다를 움직인다. 그런가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이 에스라의 영향으로 그 부인을 내보내는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느헤미야서 8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수문앞 광장의 부흥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문앞 광장에 모이고 에스라는 그 앞에 서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나간다.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통곡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한다. 놀라운 말씀의 부흥이 일어난다. 에스라의 선한 영향력이 꽃을 피우는 순간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봐야 한다. 나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영향력에 눌려서 살고 있는가. 세상이 나를 보면 내 신앙의 역동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내가 아무 말 안하고 가만히 있어서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것을 알게 되는가.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통해서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정직하게 답을 내려봐야 한다. 그런 다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역동성이 어디서 오는가를 에스라에게 배워야 한다. 오늘 본문 7장 6절에 보면,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니라”라고 했다. 에스라가 아닥사스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9절에 보면,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고 했다. 4개월간의 여정을 무장병력의 도움없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아닥사스다에게도 보였다.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라고 말한다. 아닥사스다가 에스라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에스라는 세상의 인정을 확실하게 받았다. 그리고 에스라 자신도 이렇게 고백한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7:28). 에스라가 가졌던 영향력의 비결은 하나님의 손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무리 능력이 있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우겨도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으면 선한 영향력은 나오지 않는다. 선한 영향력은 내가 가진 능력의 발현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의 성품과 능력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를 끼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안되고 반대로 세상에 눌려서 가만히 엎드려 있다 보면 신앙이 굳어서 좀비처럼 된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금씩 영적 근육을 움직여야 한다. 조금씩 굼틀거리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들었을 때, 그래서 은혜와 감동이 왔을 때 그 감동에 순종해서 움직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매 주일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은혜다. 매 주 듣는 말씀에서 은혜받고 도전받은 대로 작은 것 하나부터 순종해서 실천하다 보면 어느새 큰 영향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은퇴 이후에 일을 안 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재정계획을 세운다. 이때 재정 컨설턴터들이 공통적으로 권하는 것이 매 달 정기적으로 적립이 되고 복리로 쌓여가는 은퇴연금이다. 소위 401K 혹은 403b 같은 것들이다. 가능한 한 절대 중간에 해지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매달 작은 금액이라고 따로 떼서 꾸준히 적립해나가면 이게 나중에는 무시못할 목돈이 되는 것이다. 같은 이치를 말씀에 적용해보자. 우리가 매주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격려하시거나 도전하시거나 치유하시거나 결단으로 내모신다. 그때마다 한 가지씩이라도 순종해나가면 이게 복리적금처럼 쌓여서 엄청난 능력이 되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소적지공, 가이치원“. 작은 공을 쌓으면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현대적으로 각색하면, “평범을 꾸준히 쌓아가면 비범해진 나를 만날 수 있다.” 이런 표현이 될 것이다. 맞는 말 아닌가. 하물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꾸준히 쌓아가면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확장해나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언젠가 엄목사님이 유각양춘이라는 설교를 하신 적이 있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한 사람으로 살자고 하셨다. 나는 지금도 아침을 시작하면서 그 말씀을 되새긴다. 오늘도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보자라고. 지금도 사실 그렇게 따뜻한 사람은 못 되겠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하고 살기 때문에 조금은 따뜻해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면 그 순간 하나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종하고자 했을 때 그 손이 우리를 도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다. 그렇게 하나씩 바꾸어나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영적인 무기력함. 영적인 좀비증상을 치료하고 신앙의 역동성을 얻고자 할 때 이것보다 더 실천적이고 더 효과적인 방법이 또 있을 지 나는 모르겠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복리적금처럼 적립해 나간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좀비처럼 굳어버린 신앙에 역동성을 불어넣는 세 가지 키워드는 결심. 용기. 선한 영향력이다. 21세기 들어서 기독교 신앙에서 이 세가지 덕목에서 가장 큰 본이 되고 도전을 주는 인물로 독일의 디트리히 본훼퍼목사님을 들수 있다. 본훼퍼목사는 24세에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로 탁월한 신학자였지만 그냥 학자에 머물지 않고 신앙을 그대로 실천하는 역동적인 목사였다. “제자도의 댓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값싼 은혜는 교회의 원수다. 값싼 은혜는 회개없는 용서고 십자가 없는 은혜다”라고 말한다. 그 말처럼 그 시대에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기꺼이 졌다. 당시 독일 교회는 국가권력에 순종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변명하면서 히틀러에게 동조하여 좀비처럼 움추려있을 때였다. 본훼퍼는 이에 맞서 고백교회를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다. 그리스도가 아닌 어떤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것은 이미 우상숭배다”라고 외쳤다.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나치에 반대하는 독일저항조직에 참여했다. 1943년에 체포되고 감옥에서 수많은 기도문과 편지와 묵상글을 남긴다. 1945년 4월 9일 전쟁이 끝나기 불과 2주전에 39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한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차분하게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 보았던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나는 본훼퍼목사가 죄수복을 벗기 전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주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찌나 경건한지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형장에서 다시 짤막하게 기도를 한 다음 용감하고 침착하게 계단을 밟고 교수대에 올랐다. 그리고 몇 초후에 죽었다. 내가 50년 동안 의사로 일하면서 그토록 경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1944년 12월 이미 사형이 확정된 본훼퍼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가족들에게 시 한편을 보냈다. 이 시가 그의 순교 후에 발견되어 곡이 붙여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찬양이 되었다. “선한 능력으로”라는 찬양이다. 이 찬양과 함께 우리들의 결심과 용기와 영향력도 도전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아멘.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 눌러도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주께서 밝히신 작은 촛불이/ 어둠을 헤치고 타오르네
그 빛에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온 누리에 비추게 하소서
이 고요함이 깊이 번져갈 때/ 저 가슴 벅찬 노래 들리네
다시 하나가 되게 이끄소서/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 밤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