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 제목은 불경하다.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취급하는 듯한 뉘앙스가 그렇고, 또 경건한 신앙생활을 가성비로 따진다면 점에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밖의 언어를 사용해서 우리 기독교 신앙이 말이 된다는 것을 변증해보고 싶었다. 가성비는 가격대비 성능이란 말이다. 가격은 싼데 성능이 좋으면 가성비가 좋다고 한다. 꽤 성능이 괜찮아도 가격이 너무 비싸면 가성비는 떨어진다. 요즘 젊은 세대는 가성비에 민감하다. 그만큼 경제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가성비란 말은 꼭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이나 계획을 추진할 때, 투자되는 노력이나 비용에 비해서 얻게될 결과가 미미해도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은 아예 시도를 안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가성비가 좋은 행위일까? 신앙생활을 해나가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일반적으로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십일조를 한다고 보면 시간적으로는 7분의 1의 비용이 들고 재정적으로는 10분의 1의 비용이 든다. 젊은 세대들이 생각할 때 결코 만만한 비용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정도의 비용 투입에 대비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뭘까? 분명하고 구체적이며 손에 잡히는 이득이 없다. 구원, 영생, 마음의 평화, 소망, 이런 것들은 확실한 이득이라고 하기엔 오히려 정신승리에 가까운게 아닐까 의심할 수 있다. 기독교가 요구하는 이런 비용들이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높은 진입 장벽이 되고 있고 가성비가 별로인 것 처럼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이 없다면 기독교를 결코 가성비 좋은 종교는 아닐 것이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생활 지침으로 주신 책이다. 이스라엘은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신분이 바뀌었고, 이제 가나안에서는 유랑하는 백성이 아닌 정착민으로 살아야 했으며 유목민이 아닌 농경민으로 살아야 했다. 가나안 땅 정복 이후에도 아직 곳곳에 남아있을 원주민들과 대치하면서 긴장관계 속에 살아야 했다.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을 것이다. 통치권력과 조직도 확고하게 구축을 해야 하고, 국방력도 강화를 해야하고, 나라를 세울 근간을 만들어 나가야 했을텐데 그 와중에 절기를 지키기 위한 비용이 너무 커서 가성비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보라. 매년마다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방문해야 한다. 가서 일주일씩 체류를 해야한다. 체류시간 일주일에 왕복 여행시간까지 합하면 절기당 소요시간이 평균 보름 정도 될 것이다. 모든 남자들이 전부. 지참해야 할 예물 경비도 만만치 않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종교적 짐이 너무 무거워 보인다. 시간적으로 재정적으로 너무 부담이 많다. 거기에 더해서 십일조의 규정도 있다. 십일조를 바치기 위해서도 그에 해당하는 재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 이것까지 치면 연간 4번씩 여행을 해야 한다. 제대로 경제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 아닌가. 더군다나 모든 성인 남성들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면 노동력, 국방력의 공백이 당연히 생길 수 있다. 또한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로 모든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면 숙박시설의 문제, 여행 비용의 문제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요즘도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이슬람 순례객들이 한꺼번에 몰려서 수많은 사람들이 압사당하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당시의 생활상은 요즘처럼 복잡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요즘만큼 많지는 않았을테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직장생활이나 경제활동이 어려울 정도의 부담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 부담이 너무 많고 가성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가성비는 비용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비록 비용 부담에도 불구하고 기대되는 결과가 크고 확실하다면 가성비가 좋아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모든 절기들을 다 지켰을 때,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결과는 무엇인가. 물론 성경은 복을 약속한다(15:6, 10,18,16:15절). 문제는 그 약속된 복들이 다 성취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 세상 사람들을 각각의 종교집단끼리 다 모아놓고 그 집단들의 부유함이나 행복지수 같은 것을 측정했을 때 그리스도인 집단이 타 종교 집단보다 월등하게 높다는 통계가 있으면 누구나 기독교 신앙을 가지려고 할 것이다. 가성비가 좋다는 것이 확실히 증명이 되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할 것이다.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기꺼이 헌신하고 기꺼이 희생할 것이다. 결과가 확실하게 보장되니까 투자되는 비용이 아까울 리가 없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통계는 없다. 그런 손에 잡히는 증거는 없단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신앙생활의 가성비는 괜찮은 것인가?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위해서 투자하고 있는 시간과 비용에 대해서 확실한 보상이 있을 것을 믿는가. 여러분의 믿음이 배신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가. 우리 믿음의 결과로 우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오늘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기를 축복한다.
첫번 째,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은 왜 이렇게 비용부담이 엄청나고 번거로운 절기들을 요구하실까 하는 것이다. 절기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거의 대부분 이단 종교에서 계율을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을 통제하고 조종하기 위함이다. 심지어 정통종교도 타락하면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비판을 받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절기들을 지키라는 계율을 주신 것도 그런 목적이었을까. 당연히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드는 절기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절기의 목적은 기억과 확인이다.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해 주신 일.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약속,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라는 것이 절기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그 정체성을 확고하게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 절기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뒤따를 것이다.
이 질문은 정체성을 잃어버렸을 때 어떤 문제, 어떤 위험이 따르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답을 대신 할 수 있다. 가나안 땅에 살면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가나안의 삶에 동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 왜 문제일까. 창세기 15:12-16절을 보자.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계약이다. 그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지만, 반면에 가나안 땅에 대해서는 그들의 죄악이 가득찬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즉 가나안의 삶에 동화된다는 것은 가나안과 함께 심판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구원받아야 할 필요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심판 받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 살면서 구원 받아야 할 당위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 믿으셔야 합니다” 하면, “알겠는데, 지금은 내가 밥먹으러 가야 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잃고 가나안에 동화되는 것은 노아 시대에 방주에서 나와서 홍수로 심판받을 세상에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밭사고 논사고 밥 먹으러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비싼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가성비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크리스챤으로서 우리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단순히 세상 사람들은 지불하지 않아도 될 시간과 돈의 비용문제가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느냐 심판받을 세상에 속하느냐 하는 정체성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단순한 종교 행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끔 “나는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것은 마치 나는 절기는 지키지 않아도 가나안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살다가는 가나안에 동화되어버리는 것은 시간 문제다.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될 것이다. 신앙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 내 생존의 문제라는 영적 절박감이 필요하다. 비록 방주안이 비좁고 냄새도 나고 불편하더라도 방주밖은 물이라는 것을 알면 나갈 생각은 안 들 것이다.
두번째 문제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계명, 즉 절기를 지키면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복은 확실한가 하는 것이다. 그 복의 약속이 확실하면 가성비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내가 받은 복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받은 복을 확인하면 받을 복도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먼 미래의 약속이 믿을만한가를 보려면 가까운 미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된다. 가까운 미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인은 과거의 약속이 이루어졌는가를 보면 된다. 결국 과거의 복이 확실하면 약속된 미래의 복도 확실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절기들은 과거에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에 대한 기억과 되새김에 관한 것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복의 약속이다. 유월절은 애굽의 장자를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원 하셨는지에 대한 기억장치이고 오순절은 가나안에 들어가자 마자 경험하게 될 추수의 은혜, 즉 가까운 장래에 성취될 은혜에 대한 소망하라는 장치이며 장막절은 광야시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호하고 인도하셨는가를 기억케 하는 장치이다. 이런 절기들을 통해서 과거에 받은 복을 되새기고 가까운 장래의 복을 확실하게 하면 앞으로 가나안에서의 모든 삶도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될 것이니 말이다. 출애굽도 그렇고 광야를 지나온 것도 그렇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스라엘은 아무 대책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농사도 전적으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유목민의 삶에서 농부의 삶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원래 농부였던 가나안 사람들이 섬겼던 농경신 바알을 믿는다거나, 땅이 생겼으니 땅이 대책이라고 생각하는 그 땅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가나안 사람들처럼 살지 말란 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백성은 광야에서든 가나안에서든, 어떤 환경에서 살든 하나님 은혜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고로 앞으로 가나안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과거의 은혜를 기억시키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이 원리를 적용해 보자. 만약 우리가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면, 우리가 앞으로 천국에 갈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끊임없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믿는가? 그리고 마침내 천국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믿는가?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 섞여서 이 땅을 살고 있지만, 그래서 그들과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대책인 것을 믿는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의 필요를 채우시고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인도하셔서 마침내 천국까지 우릴 이끄실 것을 믿는가. 이 믿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미 내가 받은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이다. 내게 임한 과거의 은혜(복)이 앞으로 받을 복의 증거가 된다면, 우린 어떤 증거를 내세울 수 있을까. 내가 받은 은혜를 증언하는 일을 기독교 전문용어로 간증이라고 한다. 간증이 확실하면 소망도 확실해 진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간증에 자신이 없는 것은, 내가 받은 복을 찾아야 할 곳에서 찾지 않고 잘못된 장소에서 찾기 때문이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해서 카우 팰리스에서 전도집회를 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이런 조크를 하시더라. 어떤 사람이 가로등 불빛 아래서 뭔가를 찾고 있기에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다. 뭘 찾습니까? 지갑을 잃어버려서 찾고 있습니다. 지갑을 여기서 잃어버렸습니까? 아닙니다, 저 쪽에서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찾나요? 저긴 가로등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찾기 편한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찾아야 할 곳에서 찾아야야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우리의 복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그 말은 내 안에 혹은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복을 받았는가 하는 것도 내 안에서 찾고, 우리 가운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어떤 성공을 거두었는가, 얼마나 많은 부와 명예를 쌓았는가, 이런 것에서 복을 찾으면 찾아지지 않는다. 신학적으로 보면 이 세상은 완성되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미 심판을 받았고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가나안과 같다. 물론 그 나라에서도 하나님은 우릴 먹이시고 입히시지만 진짜 복은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 그러니 시선을 안으로 돌려서 예수님 믿고 나서 내가 얼마나 복을 받았는지를 찾아보라. 또 신앙 공동체 안에서 내가 어떤 복을 받았는지 찾아보라. 그럼 찾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내가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세상적인 조건을 생각한다면 별로 내가 복 받았다고 할 만한게 없을 것 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나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가 받은 복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언제 가장 복 받았다고 느꼈고, 언제 가장 기뻤던가. 처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정말 행복했다. 시티 칼리지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5명이 주님의 영접했을 때, 골든 게이트 공원을 가로 질러 운전하며 돌아올 때 정말 행복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함께 홈리스 봉사 사역을 나갔다고 교회 벤을 같이 타고 돌아오면서 찬양했을 때 정말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다. 미얀마 차웅따에서 온 동네 사람들을 다 초대해서 식사하면서 5000명에게 오병이어를 베푸시는 주님의 기쁨을 누렸다. 차웅따 해변에서 침례식을 거행할 때 느꼈던 기쁨. 사역 하면서 내가 직접 침례를 베푼 사람이 133명이다. 미얀마나 중국에서 한꺼번에 침례를 준 사람들 빼고 말이다. 그 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의 보람이고 복이다. 생각해보면 인생에 가장 큰 복들은 전부 영적인 복이었고, 신앙 공동체와 함께 누렸던 것들이었다. 나는 내가 복 받은 사람이란 것을 안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도 복을 받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마침내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서 성도의 거룩한 행진에 동참할 때부터 이미 약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받았던 복이 내가 받을 복의 증거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복을 찾아야 할 곳에서 찾는다면 여러분 모두 이미 풍성한 복을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음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당연히 놀랍고 영광스러운 미지의 복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도 되지 않겠는가.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불했던 종교적 비용과 지금 우리가 지불하고 있는 종교적 비용을 비교해 보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가 지불하는 비용이 적다. 반면에 약속받고 있는 복의 내용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가 더 많다. 절기와 주일 예배. 가나안과 천국. 비교불가 아닌가. 우린 더 이상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불해야 할 종교적인 비용을 다 지불완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부활, 승천 하시면서 가나안의 복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영원한 천국에서의 영광을 보여주셨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의 가성비는 가히 대박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이렇게 진술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예전 번역에서는 그냥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표현해서 비교가 안 되도 너무 너무 안 된다는 것을 엄청 강조해 놓았는데 나는 그 예전 번역이 더 좋다. 바울의 말을 쉽게 설명하면, 비용과 반대급부를 비교해 보면, 믿음은 그야말로 가성비 대박이라는 말이다.
천국을 향해 행진하고 있는 우리들은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던 이스라엘에 비해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가성비 대박의 행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거룩한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는 확인이자 고백이다. 왜 이 영광스러운 행진에 동참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아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영적인 복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것이 뭔지도 모른다. 이분들에게는 우리 기독교가 가성비 대박의 종교라는 것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김치찌개 좋아하시는가. 돼지 고기 살짝 볶고 제대로 맛이 든 묵은지 김치넣고 두부까지 곁들이면 얼마나 맛있는가. 그런데 불행히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맛있는 김치찌개 한 번도 못 먹어보고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특히 미국 사람들 대부분을 김치찌개 맛을 모를 것이다. 참 불쌍하지 않은가. 그런데 김치찌개를 한 번도 못 먹어본 사람들에게 김치찌개 맛을 설명하려고 하면 난감하지 않는가. 짜다 맵다 그런데 감칠 맛이 난다. 뜨겁다. 그런데 시원하다. 뭐라고 말해도 설명이 안 된다. 이럴 때는 김치찌개를 먹을 때의 리액션이 중요하다. 우와, 이 맛 이거 뭐야. 오 시원해. 죽인다. 진짜 맛있는데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고 일단 한 번 잡숴 봐. 이 말밖에 못한다. 김치찌개를 먹을 때마다 그러고 있으면 보던 사람이 궁금해서라도 한 번 먹어보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리액션이 안 좋으면 아무런 타격감이 없다. 2~3주 전에 교회를 오려고 차를 몰고 있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번호가 verify된 번호라고 해서 받았더니, 한국분이시죠? 하는데 나이가 좀 있으신 여자분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했더니, 인생의 행복에 대해서 좀 말씀드리려고 전화를 하셨단다. 인생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데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감사한 생각이 손톱만큼도 안 들었다. 그래서 우린 되었습니다. 하고 끊으려고 하니까 다급하게 여호와의 증인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란다. 전화를 끊으면서 생각해보니 인생의 참 행복에 대해서 알려주시겠다는 그 분의 음성이 하나도 행복하게 들리지를 않았다. 이 분은 김치찌개 맛을 모르는 분인 것이 확실하다. 제대로 김치찌개 맛을 아는 사람의 리액션은 이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을 제대로 맛보려면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와야 하고 기독교가 가성비 대박의 종교라는 것도 일단 안에 들어와 봐야 알 수 있기에 그 통로가 되는 먹어 본 사람들의 리액션이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그 리액션이 하나로 모여서 도도한 강물처럼 대세가 되어 흐르면 그 때의 거룩한 충격은 세상을 뒤집어 놓을 것이다. 믿음은 내가 지금 가성비 대박의 행진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확인이다. 아멘.
손흥민 선수가 속해 있는 토트넘 핫스퍼의 홈경기장에서 항상 흘러나오는 응원가가 있다.
성자들이 행진할 때라는 노래다. 언제 어디서 누가 작곡하고 작사했는지는 모른다. 전통속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인데 현재 전해진 것 중에서는 1938년에 나온 루이 암스트롱의 앨범이 제일 유명하다. 그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된다.
Oh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Oh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I want to be in that number,
Oh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성경에서 Saints는 성도라고 번역을 했다. 믿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은 Saint, 즉 성자인데 성자들이 모이면 복수형을 의미하는 무리 “도”자를 사용해서 성도라고 번역한 것이다. 축구 응원할 때는 saints 대신 Spurs라고 바꾸어서 부른다. 하지만 원래는 흑인영가였고 믿음의 노래였다.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듯 성도들이 천국을 향해 행진해 나갈 때 그 영광스러운 행렬에 나도 같이 끼고 싶다는 믿음의 열망이 담긴 노래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시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이 제일 가운데 자리 잡고 있고 레위인들이 성막을 빙 둘러 지키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행렬을 이루어서 함께 나가는데 그 위 하늘에는 낮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모습을. 얼마나 영광스러운 행렬인가. 그러면 이제 다시 한 번 상상해 보자. 이 세상의 모든 믿는 성도들이 다 함께 모여서 Oh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이 노래를 부르면서 천국을 향해서 행진하는 모습을. 만약에 영적인 눈이 띄인다면, 천군천사들이 사방에서 호위하고 있는 것이 보일 것이고, 어떤 천사들은 루이 암스트롱보다 더 신나는 연주로 트럼펫을 불고 있을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처럼 앞에서 이 행렬을 이끄실 것이고, 구름과 불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거룩한 임재로 동행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행렬의 영광은 이스라엘의 행렬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울 것이고 이 행렬의 가성비는 이스라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야말고 가성비 대박의 행렬일 것이다. 그러니 이 수지맞고 영광스러운 행진에서 우리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고 끝까지 같이 갈 수 있기를 축복한다. 그리고 아직 이 행렬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녀들, 가족들, 친구들까지 마침내 I want to be in that number라고 노래하면서 이 행렬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