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주시는 사건이다. 이 짧은 본문에 풀어야 할, 가볍지 않은 오해가 세 개나 담겨있다.
소경을 보고 제자들이 묻는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본인의 죄 때문인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가? 대답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정하고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 뒤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권능에 대한 기본 전제가 깔려 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의롭고 또 전능하시다. 그러므로 선한 원인에는 선한 결과가 따르고 악한 원인에는 악한 결과가 따라야 마땅하다는 이해다. 소경의 경우는 실존적으로 악한 결과가 드러났으므로 반드시 누군가의 죄가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란 논리다. 그렇지만 한 걸음만 더 들어가서 따지면 이에 대한 어떤 대답도 불합리하다. 만약 본인의 죄라고 한다면,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이 무슨 죄를 짓는다는 말인가. 만약 부모의 죄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모들의 몫이지 선택지 없이 그냥 태어난 아기가 왜 소경이라는 부당한 징벌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은 공의롭고 전능하신 분이 맞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고 인과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수한 불행과 불합리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인류 타락 이후에 인간성도 어긋났지만, 자연도 어긋났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도 부분적으로 구원받고 있고 자연도 부분적으로 회복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때까지 사람과 그 이외의 모든 피조물도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고 바울은 진술한다(로마서 8:21). 어긋난 세상에서 어긋난 인간들이 모여 살고 있으니, 이해하지 못할 불행과 불합리는, 굳이 누구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신다.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이 대답이 두 번째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과시하려고 인간의 불행을 도구로 사용하시는가 하는 오해다.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은 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큰 불행이다. 이렇게 큰 불행이, 단지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고 영광스러운 분인가를 드러내는 한 순간의 도구로 이용된다면, 한 인간의 삶은 너무 허망하다.
이 또한 당연히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것이 그렇게 허접하지 않다. 눌부가 제비 다리 부러뜨리듯이, 한 인간을 소경으로 만들어놓고 고쳐주는 쇼를 해야 겨우 받을 수 있는 그런 영광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영성이 깨어있다면, 모든 상황 속에서, 비록 그 상황이 악해 보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제 예수님이 소경을 고쳐주신다. 그런데 그 과정이 좀 지저분하고 번거롭다.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기고 그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발라주고 실로암 물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다. 이 과정이 세 번째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냥 말씀만 하셔도 될 일을 왜 이렇게까지 파격적인 방법을 쓰시는가. 이런 일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침의 효능과 진흙의 성분, 그리고 실로암 물의 약리작용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한다. 말짱 헛일이다. 예수님은 그냥 순종을 원하실 뿐이다. 순종을 마치 기적의 마중물처럼 기대하시는 것 같다. 합리적인 기적은 합리적인 순종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합리성을 뛰어넘는 기적은 합리성을 뛰어넘는 순종을 요구할 수도 있다. (요구할 수도 있다고 표현한 것은 이것이 꼭 그렇다는 법칙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인 일을 사람이 법칙으로 묶어둘 수는 없으니까). 예수님이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생각해 보라. 물을 길어오는 순종을 먼저 요구하고 나서 포도주를 만드신다. 물이 포도주의 마중물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요구되는 순종의 내용은 매우 개별적이어서 하나의 케이스를 다른 케이스에 대입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순종”이라는 큰 원리 하나를 붙잡는 것외에 다른 구체적인 방법을 적용하려고 하면 안 될 것이다.
세 가지의 오해를 다 풀고 나면 결론은 명료해진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4절). 시간이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모든 상황 속에서 그렇게 일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도 그렇게 살 여지가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상황과 여건을 따지고, ‘왜’라는 질문에 매달리기 보다는, 그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