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2026(수)
요한복음 7:53-8:20, 주제넘은 말 같아도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본문이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증가하고 있다. 예수님은 긴장을 완하시킬 의도는 전혀 없어 보인다. 모난 돌이 징 맞는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모난 짓을 계속 하신다. 바리새인들도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공격할 구실을 찾는다. 이제는 의도적으로 함정을 만들어서 예수님을 빠트리려고 한다.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왔다. 그 현장 자체가 함정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장에서 여자만 잡히고 남자는 없어졌다는 점에서 그럴 가능성은 다분하다. 어쨌거나 여자의 입장에선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것외에 다른 여지는 없어 보인다.
바리새인들로서는 치솟는 예수님의 인기를 잠재울만한 카드였다. 만약 예수님이 여인에게 돌 던지지 말라고 하면, 그 돌이 대신 예수님을 향해 날아가게 만들 수 있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이 너무 맹백하게 되니까 말이다. 반면에 여인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한다면, 사람들은 예수님도 별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자기를 시험에 빠트리려는 자들이 도리어 시험에 빠지게 하셨다.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순식간에 그들의 시선을 정죄의 대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에게 돌리게 만드셨다. 자신의 죄를 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향해 돌을 던지면 그 돌은 동시에 자기를 향해서도 날아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 누가 감히 자신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조용히 돌을 놓고 떠나가는 사람들과 기세등등하고 자신만만해서 여인의 머리채를 끌고 오던 사람들이 사실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순식간에 변했다. 자신을 통찰하게 만드는 예수님의 말 한 마디가 만들어낸 변화였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정죄하려던 의도는 좌절되고 도리어 자신이 시험에 빠져 현장을 떠나갔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정죄하지 않는다고 선포하셨다. 여기서도 누군가는, 여인이 회개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죄사함이 선포될 수 있느냐고 논쟁하고싶을 지 모르겠다. 그냥 창조주께서 용서하시면 그렇다고 받아들이자. 창조주의 용서를 받은 여인은 이후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주님이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하셨으니, 최선을 다해서 죄를 멀리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질시와 낙인은 아마 평생을 따라다녔을 것이다. 신상이 다 털려버린 죄인이 어떻게 평탄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여인은 최소한 창조주로부터는 용서를 받았다. 반면 돌 놓고 떠났던 사람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통찰했지만 창조주의 용서는 얻지 못했다. 과연 누가 더 자유로운 삶을 살았을까.
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8:12) 라고 말씀하셨다. 항상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하신다. 그 계시 앞에서 올바로 반응하여 생명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계시에 의하면 여인은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살지만 생명의 빛 가운데 있는 것이고 바리새인들은 세상의 밝은 곳에 살지만 영적인 어두움 속에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계시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다시 딴지를 건다. “당신이 스스로 당신에 대해 증언하니 당신의 증언은 참되지 못하오”(8:13) 이 지적은 합리적이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 입으로 자기가 이런 사람이라고 내세우지 않는다. 아무리 겸손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말해줘야 신빙성이 있는 것이지, 자기가 자기를 겸손하다고 내세우면 주책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신다. 주제넘고 교만한 발언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하면 딱히 아니라고 반론하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기도 고깝다. 그래서 그 말을 누가 보증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절묘하다. 아버지가 내 증인이지만, 하나님의 증언이 없어도 내 증언은 참되다. 그 근거는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8:14).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차원의 말이다. 허풍으로라도 할 수 없는 말이다. 유사이래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 혹시 내가 니체와 대화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꼭 물어보고 싶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인생의 앞과 뒤에 어떤 장면들이 연결되어 있는 지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 그런 분이기에 그분의 말씀이라면 충분히 믿을만한 것이다. 그런 분이기에 나를 충분히 맡길만한 것이다. 그런 분이기에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서 빛을 덧입고 싶은 것이다.
주님, 참빛이신 주님의 임재안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빛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주님처럼 다 알 수는 없어도, 최소한 내가 가는 곳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안고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