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에서 화제가 된 재미있는 광고문구가 하나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어차피 지금도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이 말이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과 격렬하다는 말의 이질적인 동행이다. 다음 소개하는 만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면 실감이 날 것이다. 어느 백수가 근육을 무리하게 사용하다가 인대가 늘어나고 근육이 찢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백수가 근육을 무리하게 사용할 일이 뭐가 있는가 궁금하겠지만 실상은 이랬다. 어느날 빈둥거리면서 T.V를 보다가 채널을 돌리고 싶었다. 리모컨이 저쪽 발 아래 가 있다. 리모콘 집어달라고 아내를 부르는데 대답이 없다. 몸을 일으켜 세워서 주우면 되는데 귀찮다. 발가락으로 리모콘을 집어 올리려고 발을 뻗는데 좀 모자란다. 꿈틀꿈틀 움직여서 조금만 몸을 밑으로 움직이면 되는데 그것도 귀찮다. 그 자세 그대로 최대한 다리만 밑으로 뻗는데 그래도 조금 짧다. 바들바들 면서 조금만 더 뻗자 하다가 그만 근육이 찢어져 버린 거다. 백수는 아무 것도 안 했지만 마음만은 격렬했다.
다른 장면을 하나 보자. 바다에 격렬한 파도가 인다. 배안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다. 제자들의 마음도 격렬하다. 격렬하게 두렵고 불안했다. 그래서 우왕좌왕하다가 불만도 격렬해졌다. 그리고 두 가지 잘못된 판단을 한다. 첫째는 우리가 죽게 되었다는 것.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 것도 안 하시고 상황을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격렬함 속에서 주무셨기 때문이다. 바다도 제자들의 마음도 격렬했지만 예수님은 고요하셨다. 그리고 그 격렬함을 꾸짖어 이내 고요하게 하셨다. 바다도, 제자들도. 예수님은 내면의 고요함으로 밖의 격렬함을 다스리신 것이다.
백수와 예수님 사이에서 누구를 닮고 싶은가. 당연히 예수님을 닮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실제 당신의 모습은 누구와 비슷한가. 마음은 격렬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못하고 자신만 상하는 백수, 혹은 마음은 격렬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제자들과 비슷하지는 않는가. 최근에 내 마음이 격렬했다. 속 시끄럽게 하는 일들이 속속 발생했다. 차 한 대가 밧데리에 문제가 생겨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새 배터리로 갈았는데도 시동을 걸 때마다 점프를 해야했다. 그런데 다른 한 대는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트랜스미션이 고장난 것이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수리비가 엄청 비싸다. 그리고 매카닉에 따라서 수리비의 편차가 너무 심하다. 3200불에서 6500불까지 차이가 난다. 무조건 싼 곳에 맡기기도 불안하고 중고차를 그 많은 돈을 들여서 고치는 것이 맞는 것인가도 애매했다. 여러 군데 전화하고 견적받고 하느라 한 동안 마음이 복잡했다. 그러는 차에 이빨이 또 아프다. 조금씩 아파오던 이빨인데, 어차피는 발치를 해야하는데, 그 이후에 대책이 없어서 그럭저럭 버텨오던 송곳니가 이제 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어쩔 수없이 빼고나서 치과를 나서는데 자꾸만 혀는 빈 자리를 들락거리고 어찌할까 대책없는 궁리를 하고 있는 내 마음은 복잡했다. 우리 말에 “속 시끄럽다”는 표현이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표현이 절묘하다. 속이 시끄럽단다. 당연히 그 속이란게 뱃속은 아닐거고 마음 속일텐데, 마음 속에서 이런 소리도 들리고 저런 소리도 들린다. 잡음도 있고 잡생각도 있다. 이런 내면의 격렬함 가운데 오늘의 본문이 만났다. 그리고 이 본문을 붙잡고 묵상하면서 내면의 격렬함이 상당 부분 다스려졌다.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이 깊은 공감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 가장 격렬한 사건이라고 할 수있다.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라. 유월절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모여 들었다. 성전 뜰에는 성지순례 온 사람들이 제사에 사용할 양과 소 같은 짐승들을 파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제사에 쓸 짐승은 흠이 없다는 대제사장의 승인이 있어야 했고 그런 짐승을 거래 과정 또한 대제사장이 주관했으므로 이 과정에서 대제사장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전세는 성소의 세겔로 내야하는데 당시 민간이 사용하던 세겔의 단위와 달랐다. 또한 로마의 화폐 단위와도 달랐기 때문에 20세 이상의 유대인이나 개종한 이방인들은 누구나 환전상에게 돈을 바꾸어서 성전세를 내야 했고 이 과정을 산헤드린 공의회가 관장하면서 이또한 막대한 이권이 되었다. 그러니 성전의 뜰은 거대한 상권을 형성한 장마당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이 이 장마당을 뒤집어 엎은 것이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 뜰에서 양과 소들을 쫓아내셨다. 채찍에 쫓긴 짐승들은 정신없이 내달리고, 짐승 장사들은 내 달리는 짐승들 뒤를 허둥지둥 쫓아다니고, 먼지가 일고, 고함소리가 들리고, 환전상들의 상이 뒤집혔고, 아울러 환전상들의 눈도 뒤집혔다. 동전이 흩어져 굴러다니고, 땅에 떨어진 돈을 줍느라 환전상들은 정신이 없고, 적개심이 가득한 바리새인들은 트집거리를 잡기 위해 살벌한 눈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고,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격렬한 사건인가.
그런데 이 격렬함 가운데서 예수님의 내면은 참으로 고요하셨다. 가장 격렬한 순간을 가장 고요하게 마주보고 다루신다. 정말 그러셨는가. 이 순간을 예수님이 내면의 고요함으로 다루셨다는 최소한 세 가지 증거를 본문에서 제시할 수 있다.
첫번째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의 반응이다. 짐승도 몇 마리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고 환전상의 밑천도 몇 천불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유월절에 각지에서 모여든 유대인들과 개종한 이방인들을 상대로 한 장사였으니 그것도 독점적 사업이었으니 그 자금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짐승들을 내몰았고, 특히 돈을 쏟으셨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손해에 대해서는 정말로 민감하다. 사업하는 사람의 사업 자금을 다 엎으셨다는 것은 그야말로 죽기 살기의 문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 욕하고 대들고 변상하라고 악다구니를 쓰지 못했다는 말이다. 왜 그랬겠는가. 예수님의 권위에 압도당한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얼굴을 붉히고 목소리를 떨면서 고함을 지르면서 힘으로 윽박질렀다면 이 장사치들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돈이 걸린 문제에 힘으로 윽박지른다고 고분고분할 사람들은 없다. 1992년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 6일간 일어났던 L.A 폭동을 생각해봐라. 로드니 킹 사건으로 시작된 흑인들의 분노의 불똥이 한인들에게 번졌다. 수많은 한인 상가들이 불타고 약탈당했다. 그런데 그때 T.V뉴스에 담겼던 장면들이 충격적이었다. 규모가 큰 마켓을 운영하고 있던 한인들은 종업원들과 함께 마켓 옥상에 올라가서 장총을 들고 폭도들과 맞서면서 마켓을 지켜냈다. 그런데 소규모의 가게를 혼자서 운영하던 어떤 분은 한 손으로는 카메라로 몰려오는 폭도들을 연신 찍어 채증을 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권총을 들고 공포탄을 쏘면서 온 몸으로 가게를 지켜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것이었다. 뉴스에 생생히 중계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얼핏 든 생각은 이랬다. 저렇게 까지 해야 하나. 주고 말지. 중요한 게 목숨이지 돈인가. 그러다가 바로 다음 순간, 아차 했다. 목사가 이렇게 공감 능력이 없어서야 하고 한탄했다. 남들이 볼때는 저렇게까지 악착같이 지켜야 하나 할 수 있지만 막상 자신의 문제가 되면 목숨이 돈보다 중요한 게 아니라 돈이 목숨이다. 그것도 자신 눈앞에서 그 돈을, 그 비즈니스를 누가 엎어버린다면 가만히 앉아서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이 예수님에게는 그렇게 못 했다. 힘으로 윽박지른 것이 아니라 고요함 속에서 나오는 확신에 찬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요한 권위에 압도당한 것이다. 이같은 예는 또 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군병들이 유다를 앞세우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다. 이때 그들은 검과 몽치를 들고 있었다. 몽치는 쇠뭉치가 사슬에 달려있는 치명적인 무기다.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의 머리를 내리쳤던 바로 그 무기다. 이런 치명적인 살상무기들로 무장한 병사들이 기세등등하게 몰려왔을 때, 그들 앞에 내가 바로 너희가 찾는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제자들 앞으로 조용히 한 걸음 내 딛으셨다. 그때 예수님 앞에서 군병들이 꼬꾸라지면서 무릎을 꿇었다. 고요함의 권위에 압도당한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보면 정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무장병력앞에서 뒷걸음질로 물러나면서 쓰러져야 할 사람은 체포될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게 체포하러 온 사람들이 쓰러진 것이다. 힘에 제압당한 것이 아니라 권위앞에 무너진 것이다. 그런 권위는 고요함에서 나온다.
두번째는 예수님의 섬세함이 또 다른 증거다. 격렬함 가운데서도 놀라운 섬세함이 엿보인다. 예수님께서 짐승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의 돈상을 엎으시면서도 비둘기 파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고 하시면서 새장을 들고 나가도록 하셨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는 있었다.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은 소나 양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정말 형편이 어려웠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값싼 비둘기를 가지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런 형편의 사람들을 위한 비둘기 장사 역시 기업형 사업가가 아니라 생계형 장사치였을 것이다. 그리고 소나 양은 쫓아가서 잡을 수 있지만 비둘기는 날려버리면 다시 잡지 못하는 게 아닌가. 예수님이 격렬한 사역 가운데서도 이렇게 섬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으로 그 사역을 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섬세함은 그분의 사역 전반에서 발견해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기 위해 가자고 선언하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여리고를 지나셨다. 이때 예수님의 어깨에는 십자가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었고, 그분의 가슴에는 인류 구원에 대한 거대한 긴장감이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때 먼 거리에서 소경 한 명이 예수님께 소리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던 이 외침에 예수님이 멈춰 서신다. 그리고 그를 불러 눈을 떠 보게 하시고 구원을 선포하신다. 우주의 창조주이자 인류의 구원자께서 한 소경의 외침에 섬세하게 응답하신 것이다. 나는 너무 큰 일때문에 너무 작은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았던 이 장면을 묵상할 때마다 참 경이롭다. 비슷한 시선을 지닌 안도현의 시를 한 편 감상해보자.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울 강가에서”라는 시다. 설마 눈발 피하려고 강이 세찬 흐름을 바꾸었겠는가. 설마 눈발 살포시 받아주려고 강이 얼기 시작했겠는가. 그런데 시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날리는 눈발 하나를 위해 강이 그 큰 몸을 결사적으로 꿈틀거려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흐름을 멈추고 얼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시인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 그리고 이런 섬세한 사랑은 내면이 고요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사람은 자기 속이 복잡하고 어떤 이슈에 사로잡혀 있으면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섬세한 관심과 반응을 보일 수 없다. 투명하고 고요하면 한없이 섬세할 수 있다. 예수님처럼.
세번째 증거는 심오한 진리의 선포다.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답하신다. 유대인을은 당연히 이해를 못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이후 성전중심의 유대교에서 성령의 임재로 새롭게 전개될 기독교 신앙으로의 대전환을 선언하셨다. 즉, 신약성경에서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영적 진리를 이 격렬한 순간에 선포하신 것이다. 마음이 시끄럽게 요동치는 가운데 어떻게 이런 진리를 선포할 수가 있겠는가. 이 진리가 이 자리에서 선포되었다는 것은 이토록 격렬한 순간에도 예수님의 내면을 한없이 고요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럼 이제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한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토록 고요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고요함을 배우고 싶지 않은가. 속이 시끄러운 나는 정말로 격렬하게 예수님의 고요함을 배우고 싶다. 일단 내면이 고요해야 삶도 고요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나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두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힌트가 나에게는 분명 도움이 되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첫번째 힌트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와 태도이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라”(24-25절) 예수님이 사람의 속을 다 아셨다고 한다. 사람 속을 다 알면서도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같이 저녁 먹고 나서 하룻밤 사이에 배반할 것도 아셨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 칠 것도 아셨다. 그런데도 사랑하셨다. 끝까지 사랑하셨다. 실망하고 허탈해하고 분노하고,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가 없었다. 우린 흔히 이런 말들을 하곤 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래. 그런 한탄성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이라서 그렇다는 거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역사는 배반의 역사다. 에덴동산에서 배반하고 반역하는 것으로 인간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작정하면 사랑을 시작한 그 순간 앞으로 닥칠 어떤 경우에도 놀라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의탁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참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맡기는 것, 기대하는 것, 바라는 것, 이런 것들이 다 포함된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되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지는 않으셨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린 거꾸로 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사랑은 하지 않으면서 의지하고 기대려고 한다. 혹은 사랑하되 사랑만큼 어쩌면 사랑보다 더 큰 기대감을 같이 묶어 내보낸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기대하고 요구하고 바라는 것이 많다면 이런 자세와 태도는 결코 우릴 고요하게 버려두지 않는다. 끊임없는 실망과 배반감과 미움과 분노와 증오의 파도가 우리 속을 시끄럽게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인간관계를 배워야 고요할 수 있다. 책임지라고 하고, 책임지겠다고 큰소리 치고, 의지하고 기대할 수록 속은 격렬해진다. 도대체 우리가 남을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인가. 자기 자신은 책임질 수 있는가. 없다. 자식도 책임질 수 없고 부부도 서로 책임질 수 없다. 우린 다만 사랑할 뿐, 우릴 책임져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서로 기대고 기대하는 것도 다스려야 한다. 자식에 대한 기대감보다 사랑이 커야 한다. 누군가에 대한 바램보다 사랑이 커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점점 커지고 기대감은 점점 낮아져서, 사랑의 양이 기대감의 양보다 훨씬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힐링이 일어난다. 그 편차가 클 수록 힐링은 강렬하다.
새로운 목사가 부임하기만 하면 몇 달 안 되서 목사를 쫓아내는 교회가 있었다. 계속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지역사회에도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그런 교회에 어느 날 새 목회자가 부임을 했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목사가 쫓겨 갔다는 소문이 들리지 않았다. 일 년이 지나도 조용했다. 오히려 교회가 잘 된다고 하는 소문이 들린다. 궁금해서 옆교회 장로님 한 분이 그 교회 중진에게 물어봤다. 어떤 목사가 왔길래 교회가 조용하고 잘 되느냐고. 그 교회 집사님 왈, 특별히 잘 하는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새 목사님이 오시면서 한 설교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 목사님이 부임하면서 한 첫 설교가 “삯꾼 목자와 늑대 교인” 이란다. 난 이 교회가 어떤 교회인줄 잘 알고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양떼가 아니라 늑대라는 것도 잘 압니다. 피장파장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선한 목자가 아니라 삯꾼 목자 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서로 삯꾼이고 늑대라고 생각하고 피차 기대하지 맙시다. 뭘 제대로 못하면 삯꾼이 별 수 있겠나 생각해주세요. 도 늑대가 별 수 있겠나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다가 혹시 한 가지라도 잘 하는 것이 보이면 어쭈 삯꾼이 제법이네 하고 인정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여러분이 잘 하는 것이 있으면 어쭈구리 늑대가 제법이네 하고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지내다 보니까 정말로 못하는 것은 그렇겠거니 하고 넘어가지고 조금이라고 잘 하는 것이 눈에 띄면 어쩌구리하고 칭찬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6개월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갔는데, 지금은 교회가 무척 평온하단다. 기대감을 낮춘 것이 힐링의 시작이었다.
그럼 이런 가정을 한 번 해보자. 사랑은 한 없이 커지고 기대감은 제로에 가깝도록 낮아지면, 그래서 예수님처럼 기대감은 1도 없이 오직 사랑만 내 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엄청난 힐링의 능력이 나타날까. 그런 반면에 우리의 내면은 한없이 고요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버클랜드 침례교회에서 소그룹에 대한 컨퍼런스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낮에는 목회자와 교수님들이 소그룹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이론들을 발표하고 저녁에는 소그룹 리더들이 실제 경험과 사례들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어느 한 소그룹 목자의 간증이 감동적이었다. 목자의 입장에서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목원들을 기꺼이 섬기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시험이 들더란다. 한 목원이 자기를 교묘하게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면서였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되지 않은 가정이었으니 정착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데, 너무도 당연히 도와줄 것을 알고 수시로 이런 저런 부탁을 하더란다. 라이더 좀 해 달라, 이사갈 집 좀 알아봐달라, 아이들 학교문제 좀 알아봐 달라, 심지어 장 좀 봐달라고 하는 데서는 그만 짜증이 나고 화가 폭발했다. 도저히 기쁨으로 섬기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서 괴로워하면서 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이런 꿈을 꿨단다. 큰 쟁반이 하나 있고, 거기 오병이어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성찬식이 행해지고 있는데, 어느새 쟁반에 담겨져 있던 오병이어가 예수님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예수님의 몸이 쟁반에 담겨서 찢어지고 나눠져서 성찬식의 떡과 잔으로 쓰여지고 있었다. 그렇구나. 내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살았구나 하고 감격해 마지 않고 있는데 어느새 그 예수님의 몸 대신에 자기가 그 쟁반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쳐 놀라면서 꿈을 깨었단다. 그리고 펑펑 울면서 회개하고 다시 헌신했단다. 그래 내가 오병이어처럼 쟁반에 가만히 누워 있을테니 마음껏 나를 뜯어 먹으라고 맡겨버렸단다. 내 시간이 필요하면 가져다 쓰고, 내 차가 필요하면 가져가시고, 뭐든 필요하면 마음껏 사용하라고 맡겨버리니 그 다음부터는 원망도 섭섭함도 억울함도 없이, 그렇게 마음이 고요하고 편해지더란다. 사람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고, 그러나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인간관계를 배우는 것이 고요함의 첫번 째 비결이다. 아멘.
두번째 힌트는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짐승들을 내몰려면 채찍이 필요한데 마침 채찍이 없으니까 노끈이라도 꼬아서 채찍을 만드신 것일까.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달리 생각하면서 힌트를 얻었다. 노끈을 꼬아서 채찍을 만들려면 잠시라도 시간이 걸린다. 몇 십초 일지 혹은 일분정도일지, 아니면 좀 더 걸릴지는 몰라도 아무튼 어떤 액션을 앞두고 약간의 여백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Divine Pause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다. 거룩한 여백이라고 할까.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사역 전반에서 이런 여백은 쉽게 발견된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한 손에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머리채를, 다른 한 손에는 돌을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분명했다. 여인은 당연히 돌맞아 죽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까지 돌로 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온 것이다. 질문을 받은 예수님이 땅에 뭘 적으셨다. 누구도 모른다. 무슨 내용을 적으셨는지. 분명한 것은 이 짧은 순간도 거룩한 여백이었다. 잠시의 여백 후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다시 땅에 뭘 쓰셨다. 두번의 여백을 가진 것이다. 첫 번째 여백이 예수님 자신을 위한 여백이었다면, 두 번째 여백은 누구를 위한 여백이었을까. 그 짧은 시간에 사람들은 생각했고 그리고 돌을 놓고 떠나갔다. 그들의 의도가 180도 바뀐 것이다.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올때만 해도 여인을 살려둔다는 생각은 1도 없었다. 시간적으로 보면 그 짧았던 여백이 그들의 격렬한 분노를 고요한 성찰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것이 여백의 힘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여백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격렬함을 고요함으로 바꾸는 여백의 능력을 경험케 해 주신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 전에도 예수님은 잠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 이것도 여백아니겠는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는 이틀 간의 여백이 있었고, 십자가를 앞두고는 겟세마네의 긴 여백이 있었다. 그리고 매일 새벽 주님은 홀로 여백의 시간을 가지셨다. 주님의 일상에서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여백은 항상 있었던 것이다. 이 여백의 시간을 통해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지혜와 영감을 얻고 자신을 사람이 아닌 아버지에게 의탁하셨다. 그리고 고요함을 얻으신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하면서 사셨다. 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무는 영성을 지니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도적인 여백이 항상 필요하셨다면, 나 같은 나태하고 속물적인 인간은 얼마나 더 격렬하게 이런 여백을 확보해야 하는가 하고 자각하게 된다. 여러분은 어떤가.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최영기목사님이 쓰신 짧은 글을 읽었다. 목회에서 은퇴하신 최목사님이 지금은 한국에서 가정교회 사역을 멘토링 하는 일에 전념하고 계신데 때때로 페이스북에 본인의 삶과 생각을 나누는 글을 올리신다. 짧지만 명쾌한 글들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데, 그날의 글 내용은 이랬다. 당신은 누구를 만나러 길을 나서기 전에 5분 정도 기도하신단다. 그 사람 만나서 무슨 말을 나누어야 할 지 지혜를 달라고 말이다. 상담을 앞두고도 5분간 기도하시고, 무슨 결정을 내리기 전에도 5분 정도의 짧은 시간을 기도한단다. 그럼 신기하게도 이 짧은 기도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고 지혜가 생긴단다. 거룩한 여백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것이 그분 나름의 여백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좋은 연습 방법이라고 생각이 된다.
본문을 묵상하고 나서 지금까지 늘 “주님의 고요함을 나에게도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수시로 하면서 살았다. 여전히 속 시끄러울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더 많은 고요함을 누리면서 살았던 것 같다. 다행히 제일 싼 값을 제시한 매케닉이 트렌스미션을 아주 잘 고쳐주어서 다시 회생된 자동차를 잘 타고 다니게 되었다. 바람 숭숭 뚫린 이빨 빠진 자리도 틀니를 만들어 끼워서 좀 불편하긴 하지만 영구처럼 보이진 않게 되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한 숨 고르며 여백의 시간을 갖는 동안, 마음에 풍랑을 일으키던 것들이 잠잠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 삶 가운데 거룩한 여백이 더 많이 확보되기를 축복한다. 예수님의 인간관계를 배우고 예수님의 여백을 배워서 속이 시끄럽기 보다는 고요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지금도 이미 고요하신가. 그럼 더 격렬하게 고요하기를 축복한다. 그러고 마침내는 주님처럼 가장 격렬한 순간에도 가장 고요할 수 있기를 격렬하게 축복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