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하셨나요? 빈속으로 오시지 않았는지? 혹시 배는 채워졌지만 마음은 허전하지 않나요? 필요한 만큼 재정은 채워지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가을이 되면 한국을 방문하는 분들이 많아서 예배당이 더 허전해질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 인생에 빈 곳이 많아진다. 치아가 하나씩 빠져나가면서 입안도 비고, 뼈에서 칼슘이 빠져나가서 골밀도도 비고 몸에서 근육이 빠져나가서 피부가 푸석푸석해진다. 자식들 빠져나가서 집도 비고 수입이 줄어들어서 주머니도 비고. 만약 우리 인생이 한 그릇의 밥을 비우는 과정이라면 우리 대부분의 밥그릇은 거의 비어 간다. 자꾸만 비어만 가는 인생 어떻게 할꼬? 그래도 여러분, 오늘 예배에 잘 오셨다. 다윗은 고백한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식탁을 차려주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친다고 했다. 오늘 이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차려주신 식탁이다. 이 식탁에서 우리가 충만하게 채워지길 축복한다.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선지자 생도의 미망인이 엘리사를 찾아온다. 남편이 죽었다. 그 여인의 삶에서 남편 자리가 비니 모든 것이 다 빈다. 왜 빚을 지게 되었는지 설명은 없지만 정황상 다 남편의 죽음이 원인인 것이 분명하다. 이제 두 아들마저 빚 때문에 종살이 가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야말로 빈집이 되는 것이다. 여인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텅 비어버린 여인의 마음에 원망이 가득 채워진다. 몇 마디 안 되는 여인의 말에서 마디마디 깊은 원망이 배어 나오는 것 느낄 수 있다. 말의 행간마다 가득 채워진 원망이 보이는가.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먼저 죽어버린 남편에 대한 원망이 깊다. 이 인간이 왜 그렇게 일찍 죽어가지고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는가 이런 뉘앙스다. 그런데 이 인간이 당신의 종이다. 엘리사를 향해 당신이 뭔가 책임감을 느껴야 하지 않겠느냐고 추궁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게다가 내 남편은 믿음이 좋았다. 그래서 뭐? 믿음 좋고 충성하면 뭘 해? 빚만 지고, 가족들 이렇게 고생시키는데. 자식들 다 종 만들게 되었는데. 이런 원망이 담긴 시니컬한 표현이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하느라 가족들을 잘못 건사한 사내들이 받았을 원망이다. 독립도 좋고, 애국도 좋은데, 니는 좋아서 하겠지만 우린 뭔데? 이런 마음 이해되지 않는가. 이런 고생을 한 자식들은 나중에 애국이란 말 들으면 아주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여인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까지 배어 나온다. 빚 준 사람이 두 아이를 데려가 종 삼으려고 한다. 빚 준 사람은 정황상 분명 이웃 사람 중 하나였을 거다. 남편 죽었으면 그만 빚을 포기하지 과부에게서 아들까지 빼앗아 가서 종 삼는다고? 이웃에 대한 원망이 한스럽다. 집에 뭐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이렇다.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나 같이 복없는 년이 뭐가 있겠어요?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이 배어 있고, 기름이 있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강조된 원망이 깃들어 있다. 빈 자리가 빈 채로, 진공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다. 허전함은 허전함만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 모든 통로를 통해서 원망이 스며들어온다. 하여, 모든 대상, 모든 사건이, 다 원망의 이유가 되어 버린다. 은혜로 채워지지 못한 빈 자리는 위험하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빈 세상에 필요한 내용물을 채워 넣으신 분이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무질서에서 질서를 세우시고 부조화에서 조화를 만들어 내셨다. 공허한 공간을 하늘의 별로 채우셨다. 바다 속을 물고기로 채우시고, 땅을 온갖 동식물로 채우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빈 인생을 채워서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다. 성경에는 채우시는 주님의 모습이 여러 곳에서 소개된다. 포도주가 떨어진 결혼식장에서 빈 잔을 채우시는 주님. 베드로의 빈 배와 빈 그물을 채우시는 주님. 오천 명이 넘는 무리들의 빈 배를 오병이어로 채우시는 주님.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민족의 빈 속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채우시는 주님. 수가성 여인의 공허한 심령을 채우시는 주님.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통과 기름통을 채우시는 주님. 그리고 오늘, 과부의 빈 그릇을 채우시는 주님. 빈 집이 될 뻔한 그 집을 다시 아들로 채워주시는 주님. 에베소서 1:23절은 예수님을 이렇게 설명한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 만물을 채워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만약 예수님이 채워주시지 않으면 우주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진다. 그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빈 그릇을 채우기를 기뻐하신다. 할렐루야.
믿음은 주님으로 채움 받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꾸 채우려고 한다. 그런데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인생의 비극이다. 예레미야 2장 13절을 한 번 인용해 보자. “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을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하는 시도는 전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채워주시지 않는 삶은 다 빈 잔이고 빈 그릇, 빈 집, 빈 배다. 2001년에 만들어진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가 있었다. 박신양과 정진영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잘 만든 코미디 영화다. 코미디 영화인데도 울림이 꽤 깊다. 내용이 이렇다. 박신양은 깡패고 정진영은 스님이다. 깡패 패거리가 패싸움에 밀려서 절로 숨어든다. 주지스님이 깡패 패거리가 절에 머무는 것을 허락한다. 정진영 등 스님들은 못마땅하다. 그래서 깡패들과 스님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일어난다. 그러자 주지스님이 문제를 하나 낸다. 이 문제를 먼저 푸는 쪽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다. 문제는 밑빠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거다. 항아리를 배위에 올려놓고 물을 부어도 다 빠져나가고, 신발로 대충 막고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빨리 물을 갖다 부어도 빠져나가는 속도를 당할 수가 없다. 스님들이 꽤를 낸다. 물 대신 스님 한 분이 항아리에 들어간다.” 세상 모든 이치가 물과 같은데 깨닫고 보면 나 또한 물이 아닐는지요”. 주지 스님 왈, ”염병하네”. 두 팀 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다가 마지막 순간에 박신양이가 밑빠진 독을 샘물에 던져버린다. 드디어 정답을 찾은 것이다. 항아리는 샘에 가라앉았고 항아리 안에도 물이 가득 채워졌다. 결국 깡패들은 절에 머물게 된다. 나중에 박신양이 주지스님께 물어본다.” 왜 우리에게 이렇게 잘 해 주세요? 착하게 살아라. 개과천선하라. 이런 잔소리도 안 하시고?” 그때 주지 스님인 김인문 배우가 이렇게 말한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냐? 그러면 너, 밑빠진 독에 물을 퍼 부을 때 어떤 생각으로 하고 채웠어?” “그건 그냥….그냥 항아리를 물 속에다 던져버렸습니다.” “나도 밑빠진 너희들을 그냥 내 마음 속에 던졌을 뿐이야.”
불교를 주제로 한 영화를 예로 들어서 죄송하지만 그쪽에도 진리의 파편은 있을 수 있으니까 예화로 가져와 봤다. 요한복음 6장 16-21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밤에 큰 바람과 파도가 일어 두려움에 휩싸인다. 이때 예수님이 걸어오셔서 배에 오르자 풍랑이 멈추고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 인생은 예수님으로 채워져야 비로소 가려던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했다면 내 안에서 나를 채우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내가 주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내가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밑빠진 항아리와 같은 내가 예수님이라는 바다 안에 잠기는 것이다. 그럴 때 내 안에도 예수님이 채워진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리학적인 법칙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한계가 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예수님은 내 안에 있다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성령 충만의 원리도 내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를 채워주시는 이치로만 생각한다. 해서 “성령님 오셔서 나를 충만케 하소서” 이런 찬양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어디 또 밖에서 불러온다는 개념이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어떻게 우주를 만드신 분이 내 안에만 있겠는가. 마가복음 4장에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배안에 있었다. 풍랑이 심하게 일었다. 제자들은 겁을 먹었는데 예수님은 풍랑 가운데서도 고요히 주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다. “우리가 죽게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절). 두 가지 현실 인식이 잘못되었다. 죽게 된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돌보지 않으시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바람도 꾸짖으시고 제자들도 꾸짖으신다. 제자들이 두려워하면서 서로 이렇게 수군거린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그가 누구이기에. 주님은 계속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야 한다. 그분이 누구이시기에. 주님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다. 다시 말하면 내 안에서 나를 충만하게 채우시는 분이시다. 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에 생명을 부여하시면서 우주를 품고 계신 분이다. 아멘.
여인의 경우를 보면 충만해지는 것이 한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일 수 있지만 또 그 과정도 있다. 어쩌면 채워지는 것보다 채워지는 과정이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 엘리사는 이웃들에게 가서 빈 그릇을 빌리라고 한다. 없는 사람이 뭔가를 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많이 빌렸을 것이다. 그런데 또 빌리라고 한다. 수치심과 자격지심으로 입 떼는 것도 어렵다. 더군다나 빈 그릇을 빌리라니. 빈 집에는 뭔가 가득 채워진 그릇이 들어가야 도움이 되지, 빈 집에 빈 그릇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무의미한 것 같은 이 불편하고 번거로운 말씀에 여인은 갈등했을 것이다. 엘리사가 당부한다. 모든 이웃에게, 조금 빌리지 말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래도 만만한 몇몇 사람들에게 갈 것이고, 대충 몇 개 빌릴 것이라는 것을 선지자가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의도적으로 모든 이웃에게 가라고 한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많이 빌리라고 한다. 여인은 순종했다. 이웃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빈 그릇? 뭐 하려고? 빈 그릇이라면 뭔가 담을 것이 생겼다는 말인데 그 집에 뭔가 생길 일이 없지 않은가. 그래도 빈 그릇이니까 못 돌려받을 셈치고 호의를 베풀었다. 그릇은 믿음과 순종의 분량만큼 모였다. 여기서 한 번 이런 질문을 해보자. 엘리사는 왜 이렇게 번거롭고 불편한 요구를 했을까? 만약 목적이 기름을 많이 주는 것이었다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택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그냥 원래 과부가 가지고 있던 기름통에서 계속 기름이 흘러나오도록 했으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안전하고 편리하지 않았을까. 마치 황금알을 낳은 거위처럼 말이다. 실제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기름통과 밀가루통을 그런 식으로 축복한 것을 엘리사도 알고 있었을 것 아닌가. 자기도 스승처럼 하면 되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정말 필요한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다. 침상에 누워 예수님 앞으로 중풍병자가 들려나왔을 때 그가 원한 것은 병에서 놓여나는 것이었겠지만 주님은 정말 그 사람이 필요한 것, 즉 죄 사함을 선포하셨다. 여기서도 같은 일을 하신다. 만약 기름병에서 기름이 계속 흘러나오도록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기름 팔아서 빚을 갚았겠지만 여인의 마음은 치유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웃들에게 빌린 그릇에 기름이 차오를 때마다 여인의 마음도 채워졌을 것이다. 이 그릇은 누구 집 그릇이지. 그렇지 전에 그 집에서 이 그릇에 가득 전병을 담아 준 일이 있었지. 배고프다고 울던 두 아이들이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지 새삼 생각이 나네. 그 집 덕에 이만큼 또 기름이 채워지는구나. 이웃에 대한 원망이 밀려나가고 고맙다는 마음이 채워졌을 것이다. 본문에 보면 그릇을 빌린 후에 문을 닫았다는 말이 두 번 나온다. 강조된 것이다. 기적의 현장에는 오직 여인과 두 아들만 있었다. 오직 세 식구만 믿음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아마 이 후에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여인과 두 아들은 서로 서로 그날의 기억을 말해주면서 격려를 주고 받았을 것이다. 이제 두 아들은 그냥 집만 채우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여인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믿음의 동역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만약 기름통에서 끊임없이 기름이 흘러나왔다면 기름통이 마치 하나님처럼 취급되었을 것이다. 기름통만 있으면 된다는 든든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은 희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릇에 기름을 채우면서 여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지고 또 채워졌을 것이다. 나를 채워준 것은 기름통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이 너무나 확실하게 고백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그릇의 기름은 팔아서 사용하고 나면 없어지는 것이지만 믿음이 있는 한 하나님의 은혜는 끊임없이 여인의 삶을 채워주었을 것이다. 여인은 빚 갚을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여인의 돈 통을 채워주신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채워주셨다. 원망이 가득하던 자리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게 해 주셨다.
빈 그릇을 빌려주었던 이웃들은 갑자기 여인이 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형편도 달라졌지만 무엇보다도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전에처럼 까칠하지도 않고 원망 섞인 말투도 없어졌다.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이 담겼다. 친절해졌고 편해졌다. 비굴함이 없어졌고 당당해졌다. 쭈글쭈글 구겨진 마음이 쫙 펴진 것이다. 예수님을 담아내는 삶은 펴진 삶이다. 예수님으로 충만해지면서 모든 구겨지고 쪼그라들고 뒤틀린 것들이 다 펴지는 것이다. 마치 구겨진 깡통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으면 다시 팽창해서 쫙 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펴지고, 이웃을 향해서도 펴지고, 그리고 자신을 향해서도 그렇다.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으로 채워지면서 동시에 활짝 펴지길 축복한다.
주님으로 충만하면 다른 것은 다 채워진다. 우리에게 주님도 필요하지만 다른 뭐도 있어서 이것 저것으로 나를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믿음은 예수님으로 채워진 다음에 그 예수님을 표현해 내는 삶이다. 예수님으로 채워진 다음에 의사는 의술을 통해 예수님을 표현해 내고 운동선수는 경기로 예수님을 표현해 낸다. 직업인은 각종 직업으로 예수님을 나타낸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직업이 다 과부의 기름 그릇이다. 직장이, 비즈니스가, 끊임없이 우릴 살릴 것이다. 월급 받아서 한 달을 먹고 살았다. 돈이 떨어졌다. 그런데 한 달 후에 다시 월급이 나온다. 또 한 그릇의 기름이 생기는 기적이다. 하나님께도 감사하지만 일터를 준 고용주도 감사하다. 장사해서 하루를 먹고 살았다. 돈은 떨어졌다. 또 하루 장사하니 또 하루치 먹고 살 돈이 생긴다. 하나님도 감사하지만 찾아준 손님들도 감사하다.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으로 채워진 삶은 모든 직업과 생업이 다 끊임없이 공급되는 기름 그릇과 같다. 과부가 빈 그릇이 채워지면서 모든 것이 다 채워진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예수님만 채워지면 모든 것이 다 채워진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1장 23절을 다시 제대로 인용하면 이렇게 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말씀드린대로 예수님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다. 내 안에서 나를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그분으로 충만한 것이 교회라고 한다. 예수님 자신으로 온전히 채워진 상태의 공동체. 그것이 교회다. 언젠가 엄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우리 그루터기 교회가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에, 한 분 한 분 돌아가시고, 결국 마지막 한 분의 장례 예배를 드리고 나서, 그렇게 다 보내드린 후에, 엄목사님 당신 손으로 이 예배당의 문을 닫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 보셨다고. 나는 그때 그 말씀을 들으면서 눈물이 났다. 그러면서 머리 속으로 어떤 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전통적인 미국의 옛날 교회들은 교회 뒷 마당이 묘지였다. 예배당 안에서 예배드리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당 안에서 예배당 뒷 마당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옮겨가고 나서 예배당 문이 닫히는 그런 영화같은 장면이 떠 올랐다. 그래서 더 실감이 났는데, 슬픈 감정이라기 보다는 감사의 마음이었다. 다행히 엄목사님이 나보다 젊어서 나를 보내주시겠구나. 그렇게 나를 보내주실 분이 있어서 참 감사했다. 그리고 그렇게 마지막까지 우리는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구나. 이런 느낌이 들어서 우리 교우님들 한 분 한 분이 참 고맙고 감사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교회 뒷 마당으로 이사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것이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젊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2세 3세들이 왁자지껄한 교회로 변모해 나간다면 더욱 감사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자꾸만 빈 자리가 늘어갈 수밖에 없다고 해도 괜찮다. 그때는 빈 자리를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을 봐야한다. 우리가 교회라면 숫자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우리는 주님으로 충만한 것이다. 빈 집, 빈 그릇, 빈 예배당이라는 말은 성립이 되어도 빈 교회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형용 모순이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말에 이미 충만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일 때마다 눈에 보이는 빈 자리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충만하신 주님을 보자. 그리고 예배 때마다 그분으로 충만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